【뉴스신】경북 영양군 석보면 광려산 자락에 자리 잡은 두들마을은 그 자체가 역사의 한 페이지다.
이곳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1590~1674) 선생이 1631년부터 터를 닦으며 이룬, 재령이씨들의 집성촌이다.
수백 년의 시간을 간직한 마을은 아직도 옛 숨결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
두들마을을 찾는 이들은 대개 이곳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마음을 빼앗긴다.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과 평온함이 방문객을 감싸안는다.
광려산 아래에 고즈넉히 자리한 마을은 역사 속 인물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그들의 삶과 정신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마을은 한국 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학적인 유산뿐만 아니라, 이곳은 조선 시대에 훌륭한 학자와 시인, 그리고 독립운동가까지 배출한 곳으로, 그 지적인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마을 중앙에는 석계 고택이 자리잡고 있으며, 석계 서당과 만석군의 집(도사고택) 등 약 30여 채의 전통 가옥들이 그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이곳에는 한국 최초의 한글 음식 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인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을 기리는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교육원은 조선시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학문에 깊은 조예를 보인 장계향 선생을 기리며, 그 시대의 삶과 음식을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많은 이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전통 반가 음식 체험관과 전통주 체험관 역시 장계향 선생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으며, 현대인들에게 전통의 깊은 맛을 전달하는 데 힘쓰고 있다.
두들마을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돌머리 아래로는 주남천, 인지천이라 불리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안산인 병암산 밑으로는 화매천이 나지막이 흐른다.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시냇물은 산과 물이 맞닿아 한 폭의 그림처럼 마을을 감싼다.
이러한 풍경 속에서 ‘두들’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산과 물이 태극을 그리듯 곡선을 이루는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하여 ‘두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는 두들마을의 자연적 경관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마을 앞 냇가에 서 있는 거대한 암벽과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넷째 아들, 항재 이승일이 새겼다는 ‘세심대(洗心臺)’, ‘낙기대(樂其臺)’, ‘서대(西臺)’, ‘동대(東臺)’라는 글씨가 석각으로 남아 있다.
그 석각들은 오랜 세월의 풍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명하게 마을을 지키고 있다.
자연과 역사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이 마을은 그야말로 한국의 전통과 자연이 결합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책이라 할 수 있다.
이 마을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그 역사적 유산 때문만은 아니다.
두들마을은 우리에게 잊혀져 가는 가치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수백 년 전, 석계 이시명 선생이 그 터를 잡았던 이유는 단순히 안식처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학문과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터전이었다. 그 정신은 지금까지도 마을 주민들과 후손들에게 깊이 새겨져 있다.
두들마을은 현대인들에게 잊혀진 가치를 상기시키는 마을이다.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삶의 철학,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는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두들마을을 거닐면서 느끼는 평온함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역사적 이야기와 조상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두들마을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장소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고요함과 깊은 자연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다시금 발견하고,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이 마을의 고귀한 정신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살아온 조상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자료출처=영양군문화관광해설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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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언:영양군문화관광해설사회